이혼 후 뭐하고 살았나 - 6
집을 팔고 집을 구하고 아내에게 돈을 보냈는지, 팔고 보내고 구했는지 행정적 절차가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법원, 부동산, 법무사, 은행, 이사업체,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이 자기 할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대한민국 경기도 안양시에 주소지를 둔 거 아닌가 한다.
삼 개월의 숙려기간의 존재가 너무 힘들었지만 순서야 뭐 어쩌겠는가 무사히 헤어졌는걸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건 이렇다. 집이 팔리고 선금을 받고 합의된 금액을 아내에게 보낸 후, 주말을 이용해 집을 보러 다녔다. 한 달에 한 번 아이와 지내기로 했고 또 그 당시엔 자가용이 없었기 때문에 교통편이 단순하고 가능한 가까운 거리의 집을 구하고 싶었다.
또 하나, 나의 사회적 현실적 위치에서 가능한 레버리지를 모두 당겨 과소비하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서울시 주소를 가진 집은 절대로 구할 수 없었지만, 시발비용이라고 하던가. 닥치는 대로 탕진하고 싶었다.
노트북과 부동산 서류가 든 책가방을 메고, 터진 컨버스와 청바지, 체크무늬 셔츠가 사람의 형태를 하고 나의 마른 몸을 끌고 부동산을 다녔다. 이봐 지갑 씨! 신분증은 챙겨야지. 왜인지 부동산에 갔다 납치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분증이 다 무슨 소용이람.
해외여행은 처음이십니까? 새로운 선물옵션이 나왔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자신감이 필요하신가요? 괜찮은 키높이 구두가 여기 있습니다! 귀에서 물이 줄줄 나오는 풍부한 싸운드! 이 이펙터만 있으면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반응은 위와 같았지만, 공인중개사의 표정은 대부분 싸늘했다. 아마 가출한 사람처럼 보였을까? 가출이 뭐 어때서 온기 없는 양반들 같으니 내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겠다는데
스스로에게서 풍기는 비린내가 심해질 때 가끔 천사가 나타나는 것 같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지막 날 100달러를 룰렛에 던져 넣을 때도 그랬다. 일본 여행에서 the pillows 공연 티켓이 마감됐을 때, 갑자기 누군가 "티켓 여기 있어요" 하고 한국말로 티켓을 건넬 때도.
아무래도 이딴 운에 기대다 보니 삶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잊히겠거니, 넘어가겠거니, 개구리, 프로거, 도로, 차에 뛰어들기, 요행을 바라기
내 거시기 냄새나 맡으며 죽어가야 하다니
운 좋게도 의욕 넘치는 공인중개사를 만났다. 집이 많은 천사. 7시간 동안 안양시 만안구 지역에서 내놓은 수많은 집을 방문하며 삶과 동네 집값 동향에 대해 설교를 들었다. 암요 그렇지. 그렇고 말고요. 천사는 대부분 날개가 있다면서요. 천사님 담당하시는 일이 참 전문적이시네요. 다 좋습니다. 부디 절 어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오후 4시쯤 방문한 집에 해가 참 잘 들었다. 집주인은 18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단다. 풍경과 자전거 이야기. 제발 그만해줬으면 좋겠지만. 깎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끝까지 듣는다. 집주인과 미리 합의 된 금액만큼 깎는다. 이 천사는 날개도 있고 후광도 끝내준다. 우리는 연극을 참 잘해요.
부동산에 돌아가 계약서를 만들고 철자를 고치고 인쇄를 두어 번 한다. 평생 만져보지 못할 금액이 오가고 이사 날을 정한다. 신분증을 복사하고 약속의 사인을 한다. 나는 지낼 곳이 생겼고, 부동산은 복비를 챙겼고, 집주인은 더 비싼 곳으로 간다. 모든 것이 잘 풀려 허망했고 바닥이 어딘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왔다.
2022년 2월 28일
목록으로